결혼한 지 4년, 그런 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던 윤희가 요즘 들어 갑자기 눈에 띄게 수척해진 것은 무엇보다 딸만 둘을 낳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그만 낳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위로 딸 다섯을 낳고 마지막에 남편인 외아들을 낳으신 시어머니께서 한사코 아들 낳기를 바라고 있었다.
첫딸을 낳았을 때만 해도 여자는 산후조리를 잘해야 된다며 꼬박 한 달 동안을 싫은 기색 없이 집안청소랑 남편 밥상까지 도맡아 신경 써 주시던 시어머니께서, 두 번째 딸을 낳았을 때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집안일은커녕 두 번째 딸은 한번 안아 주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도 윤희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하는 것은, 가끔씩 찾아오는 시누이들이 조씨 가문의 대를 끊을셈이냐며 노골적으로 아들타령을 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딸 둘이면 뭐 어떠냐며 분명히 이젠 그만 낳자고 하던 남편마저도 요즘엔 맘이 변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희가 아들 하나를 더 낳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어느 날 꿈속에서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만나고서였다.
꿈속에서 친정어머니는 윤희 더러 딸 넷을 낳고 나서야 아들을 낳게 된다고 일러주셨다. 그날 꿈속에서 네 딸, 막내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윤희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임신이 되었다. 그러나 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시어머니 몰래 중절수술을 했다. 수술한 의사선생님으로부터 딸이었다는 대답을 듣고 그녀는 거의 광적으로 꿈속에서의 예언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임신이 되었으나 이번에도 기어코 수술을 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아들이었는지 딸이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또 딸일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수술을 할 때는 버리는 아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으나 두 번째 수술 때는 그렇지 않았다. 아들을 낳겠다는 집념이 어느새 윤희를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다시 몇 개월이 지난 후 드디어 다섯 번째 임신을 했다. 이번에는 시어머니께도 말씀을 드렸다. 시어머니는 몹시 기뻐하시며 온 동네방네에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오늘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다며 시어머니께서 함께 가자고 하셨다.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을 가다가 종점에서 내렸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덜컹거리는 시골길을 한참 가서야 버스에서 내렸다.
거기서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용하다고 소문난 어떤 처녀도사 집이었다. 처녀도사라고 해서 젊은 처녀인 줄 알았더니 예순 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였다.
윤희의 아랫배를 이곳저곳 눌러보던 그 처녀도사로부터 아들이 틀림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시어머니의 굳은 얼굴이 펴졌다. 돌아오는 길에 시어머니는 한약방에 들러 보약을 한 보따리 지어주셨다.
시어머니께서 손수 보약을 달여 주셨다. 배가 점점 불러오자 시어머니께서 다시 집안일을 돌보아주셨다. 그럴수록 윤희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결국, 아들만 둘 낳은 친구가 일러주는 대로 을지로에 있는 유명한 약국에 가서 진맥을 받고 젖꼭지까지 보이고 아들이라는 판정을 받고서야 이제 윤희도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남편도 부담을 느껴서인지 한번은 양수검사인가 뭔가를 받아보자고 했다.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윤희가 거절을 했다. 그때는 설사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중절수술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윤희가 굳이 그 검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들이라는 확신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만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시어머니의 성화 때문에 미리 집 가까이 있는 병원에 입원을 했다. 분만대기실에 누워있는 윤희에게 남편은 돌아가신 시아버지께서 지어놓으셨다며 아기 이름을 보여 주었다.
‘조승룡(趙昇龍)’
승천하는 용이란다. 윤희가 첫 딸을 낳고 얼마 안 있어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다음에 아들을 낳으면 쓰라고 하시며 이 이름을 남겨 놓으셨다고 했다.
생전에 시아버지께서는 윤희에게 참 잘 해주셨다. 어느 누구보다도 애타게 손자를 기다렸을 당신이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그런 내색을 한 번도 윤희에게 보이지 않으셨다.
첫딸을 낳았을 때도 애썼다고 하시며 윤희를 위로해주셨다. 그것이 더욱 윤희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손자 이름을 미리 지어놓으시고 부담을 줄까봐 며느리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시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 아들을 낳으면 지하에 계신 시아버지께서 가장 반겨주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드디어 산통(産痛)이 왔다. 그날 남편은 출근을 하지 않고 새벽부터 계속 윤희 옆을 지켰다. 분만실로 옮긴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분만을 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윤희는 온 몸에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때 분만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남편에게 ‘축하합니다. 공주예요.’ 하는 간호사의 말이 또렷이 들려왔다. 남편은 집에다 전화를 걸고 오겠다며 뛰어나갔다.
간호사가 아기를 안고 신생아실로 간 후 남편이 들어왔다. 무뚝뚝한 성격인데도 남편은 수고했다며 연신 머리맡에서 싱글거리고 있었다.
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누워 있었다. 또 딸을 낳았는데도 실망한 내색을 하지않고 마냥 싱글거리는 남편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눈물이 또 솟아올랐다. 시어머니께서 시누이들과 함께 도착하신 건 그로부터 채 30분도 안 되어서였다.
웬 일인지 이들은 눈을 감고 누워있는 윤희에게 연신 ‘애썼다’며 위로를 하고 머리맡에 주스랑 과일 보따리를 한 아름씩 놓아두고는 곧 바로 간호사를 앞세우고 신생아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남편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 간호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제가 언제 고추라고 했어요? 공주라고 했죠.
<작가·(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