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이 두 시였으므로 한 시쯤 아내와 함께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처가 쪽 친척의 결혼식인 데다 마침 일요일이라 대구에 사는 처형과 동서도 온다고 연락이 왔었다.
그는 동서와 진하게 술 한 잔 할 생각으로 며칠 전부터 온통 마음이 들떠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도 10만원짜리 수표 석 장을 넣은 지갑을 옷 위로 꾹꾹 눌러보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아내 몰래 그 돈을 장만하느라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그의 이름은 주동주. 자칭 애주가이고 타칭 주당(酒黨)이다. 이름 석 자에 ‘주’ 자가 두 자나 들어있으니 숙명적으로 술을 피할 수가 없단다.
이제 막 사십 고개를 넘은 그가 한 달에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 날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으면 어디서 주워들은 시(?) 한 수를 읊어주곤 한다.
월요일은 월(원)래 마시는 날
화요일은 화끈하게 마시는 날
수요일은 수심이 가득 차서 마시는 날
목요일은 목이 컬컬해서 마시는 날
금요일은 금방 마시고 또 마시는 날
토요일은 토하도록 마시는 날
일요일은 일일이 찾아다니며 마시는 날
그는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면장갑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의 하루일과는 출고한 물건을 봉고차에 싣고 거래처를 돌아다니며 납품하는 일이다. 납품량에 따라 달라지는 그의 한 달 수입은 2~3백만원 정도, 그에게는 자신의 일만 마치면 바로 퇴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어떤 날은 오후 3시, 늦은 날도 5시면 어김없이 집에 들어간다.
집에 와서 낮잠을 자거나 마누라와 한바탕 뒹굴고 나면 드디어 술 마시러 출근한다. 그의 수첩에는 저녁에 만날 사람의 명단이 빽빽이 적혀있다. 거래처 손님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친구들이다. 스케줄이 없는 날은 같은 동네에사는 초등학교 동창 집에 소주를 사들고 찾아가 밤늦도록 함께 마신다.
그의 주량은 소주 세 병, 안주는 가리지 않지만 감자탕 같은 얼큰한 것을 좋아한다. 2차는 보통 호프집에 가서 맥주 몇 잔, 그리고 3차는 노래방이다. 모두 합쳐도 하루 저녁 4~5만원이면 족하다. 혹 호주머니가 두둑한 날은 영등포에 있는 카바레로 출근한다. 몇 번 드나들다 보니 어깨너머로 배운 춤 솜씨도 이젠 제법이다. 그날 만난 여자와 하룻밤 역사(?)를 이룬 적도 있었고….
그는 타고난 건강체질인 데다 매일 아침 케일과 당근을 갈아 마시고 뒷산 약수터에서 운동을 한다. 그렇게 스스로 몸 관리를 하니 매일 술을 마시고도 버틸 수가 있는 것이리라.
예식장에 도착하니 처형과 동서가 먼저 와 있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식당에서 주는 갈비탕 한 그릇과 함께 소주 몇 잔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처형이 백화점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와 동서는 어떻게든지 핑계를 대고 빠져 나오고 싶었으나 처음부터 그럴 수는 없었다. 네 사람은 지하철을 타고 가까운 백화점으로 갔다. 백화점에서 층층을 오르내리며 두 여자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처형이 몇 가지 옷을 샀다. 백화점에서 나오니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처형과 아내는 지쳤는지 집에 가서 쉬겠단다. 옳거니 싶었다. 동서의 내일 출근 때문에 올 때 밤 12시에 출발하는 차표를 예매해놓았단다. 처형과 동서는 밤 11시 40분에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하고, 자매끼리 그리고 동서끼리 나뉘어졌다.
두 남자가 이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너무 잘 아는 두 자매가 ‘제발 많이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입을 모아‘알았다’고 했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처형과 아내를 태운 택시가 저만큼 사라지자 그들도 택시를 잡았다.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서와 그는 나이도 비슷했고 전부터 죽이 잘 맞았다. 자매인 아내들 못지않게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강남역에서 내린 두 사람은 뉴욕제과 뒷골목의 한 음식점에서 장어구이와 소주로 배를 채우며 그 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시가(市街)는 온통 휘황찬란한 불야성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카바레에 들어갔다. 맥주 몇 병을 시켜놓고 앉아있는데 종업원이 혼자 앉은 한 여자를 가리키며 그보고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가 동서의 어깨를 밀쳐보았으나 동서는 춤을 못 춘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그가 일어서서 다가갔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담한 체구의 여자였다. 아줌마 티가 거의 나지 않았고 눈 꼬리에는 교태가 흘렀다. 그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오는 춤 솜씨가 보통이 넘었다. 그 여자가 살며시 앞가슴을 밀착해왔다. 농염한 체취가 그의 남성을 자극했다.
“우리, 2차 갈까?”
그가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녀가 살짝 웃었다. 웃는 모습이 요염했다. 오늘은 일진이 괜찮은 날이군. 그는 가만히 미소를 삼켰다.
그를 따라 자리에 합석한 그 여자는 그가 따라주는 맥주를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동서는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벌써 11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동서가 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나 혼자 택시 타고 갈 테니 저 여자 잘 요리해봐. 저 여자도 자네가 맘에 드는 모양이야.”
세 사람은 테이블에 있는 맥주를 모두 비우고 그 곳을 나왔다. 동서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두 사람은 근처의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노래를 몇 곡씩 부르고 나서, 그녀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뜨더니 잠시 후 ‘컨디션’ 두 병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건네주는 컨디션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눈을 뜨니 종업원이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났단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여태 그렇게 술을 마셨어도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함께 온 여자가 생각났다. 그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 여자가 컨디션에다 약을…?’
그는 벌떡 일어나 양복 윗도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작가·(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