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다!’ 하는 여직원의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창문을 향해 돌아앉았다. 군무(群舞)를 추면서 내려앉는 눈들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고, 때마침 사무실에 조그맣게 켜놓은 라디오에서 ‘스노 프로릭(snow frolic)’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맞아. 고등학교 때 보았던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선남선녀들이 눈밭에서 뒹굴 때 나오던 곡이지.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집 딸이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신접살림을 차리지. 둘은 행복하게 살지만 여자가 불치의 병에 걸려 죽고 말지. 아마 요즘 애들은 잘 모를 거야.
“정 차장님 전화 왔습니다. 설진숙이라는 분인데요.”
상상 속에서 영화의 스토리를 쫓아가던 그는 설진숙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앉았다.
어찌 그 이름을 잊을 것인가.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정현식입니다.”
“현식 씨, 저예요. 진숙이. 저 기억하시겠어요?”
“기억하다마다요, 내가 어찌 진숙 씨를 잊을 수 있겠소. 어떻게 지내오?”
“밖에 눈이 오고 있어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전화 드렸어요. 오늘 저녁에 좀 만났으면 해요. 드릴 말씀도 있고요. 저녁 6시에 회사 앞 OO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이 회사에 막 입사하던 무렵이니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날 월말 마감을 하느라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회사 문을 나서니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날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은백색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인천행 마지막 전철을 타고 가다 부천역에서 내렸다. 밤 12시가 조금 안된 시각이었다. 부천역 앞 신천리행 택시 승강장에는 회색 버버리 코트에 검은 목도리를 한 젊은 여자 한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행선지가 같으면 합승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 어디까지 가십니까?”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핏 보니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그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천리요. 눈 때문에 차가 모두 끊어졌나 봐요. 택시도 안 오고, 어떡하면 좋죠?”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도 신천리 갑니다. 걸읍시다. 가다가 택시가 있으면 잡고….”
도로를 따라 함께 걸었다. 눈은 계속 퍼붓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스노 체인을 단 택시 한 대가 달그락거리며 다가왔다. 손을 들었으나 그냥 지나가 버렸다.
다시 걸었다. 눈보라가 더 심해져 이제 걷기도 힘들었다. 저 앞에 여관의 불빛이 보였다. 그가 앞장서서 들어가자 그녀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처음에는 몸을 사리며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었지만 그가 따뜻한 아랫목을 권하자 살며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불이 꺼지고 그의 손이 가슴에 닿자 그녀가 몸을 오그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차츰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탐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방면으로 경험이 꽤 있는 여자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마치 연인처럼 나란히 여관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나 애욕을 불태웠다.
봄에, 둘이 창조한 3개월짜리 새 생명을 산부인과에서 지워버리는 죄악을 범하고서야 두 사람 다 제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도 몇 번 더 만나기는 했지만 사이가 차츰 멀어져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그해 가을, 그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가 결혼하고 일 년쯤 후 그녀도 결혼을 했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왜 갑자기 연락이 왔을까? 남편과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눈이 오니 갑자기 옛날 그 신천리 생각이 난 걸까? 이따 저녁에 만나면…. 그녀가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하겠지. 그러면 어떻게 하지? 근처 모텔로 들어가서, 방안에서 단둘이 남게 되면…. 그녀가 눈을 감고 스르르 안겨오겠지.
“이봐, 정 차장! 옛날 애인이라도 온댔어? 전화 받더니 아침부터 정신이 나갔어.”
저 쪽 옆에 앉은 입사동기생 김 차장이 다가와 말을 거는 바람에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응? 아냐, 애인은 무슨….”
그러나 김 차장은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내,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말이야. 한 번 헤어진 여자와는 다시 안 만나는 게 좋아. 잘못하면 아름다운 추억마저도 모두 날아가 버린다니까.”
하루 종일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드디어 퇴근시간이 되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고치고 곧바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가 들어서자 저만치에서 한 여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였다. 손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어머, 현식 씨는 그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그가 다가가자 그녀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손톱이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너무 진하게 화장을 한 데다 얼굴에 가식적인 웃음이 발려있었다.
“진숙 씨도 하나도 안 변했구려.”
그도 건성으로 맞장구를 치며 마주 앉았다. 그가 오늘 종일 가슴 설레며 그리던 상(像)은 이미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가 ‘할 말이 있다더니…’ 하며 본론을 끄집어내자 그녀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말했다.
“이거 하나 작성해주세요.”
그녀가 핸드백에서 무슨 용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의 앞으로 들이미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OO연금보험 청약서였다.
한 번 헤어진 여자와는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다던 김 차장의 충고가 생각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에는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