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머리
댕기머리
  • EPJ
  • 승인 2011.03.2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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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 (32)

2층 강의실 창가에 서서 석양에 물들어 가는 캠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을 끝낸 과우(科友)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라진 곳에서 두 여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홍색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에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정장 차림에 긴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모습이었다. 둘 다 한 손으로 책을 안아들고 얘기를 나누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밑에까지 오자,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티 없이 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곱게 땋은 머리에 앙증스럽게 달려있는 빨간 댕기….

나는 그들이 건물 모퉁이에서 여자기숙사 쪽으로 돌아들어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댕기머리 여학생의 잔상(殘像)이 여운처럼 뇌리에 인각되었다.

‘아, 중국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구나.’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강의실을 나와 땅거미 지는 캠퍼스를 뒤로하고 하숙집으로 향했다. 군대생활 하는 동안 연애는커녕 여자하고 말이나 제대로 해보았던가. 면회 온 애인과 함께 주말에 외출하는 전우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복학하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연애도 멋지게 한번 해보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제대하고 며칠 쉬지도 못하고 바로 일주일 전에 2학년에 복학하지 않았던가.

저녁을 먹고 하숙집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 있는 책꽂이를 보니 또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일주일 전, 학교 정문 쪽에 하숙집을 구하자마자 필요한 가재도구를 싸게 사기 위해 재활용센터에 갔었다.

책상과 의자는 오래 쓸 수 있도록 튼튼하고 좋은 걸로 골랐다. 책상 위에 올려놓을 책꽂이는 2단짜리를 살까, 3단짜리를 살까 고민하다가 2단짜리로 샀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필요한 책들을 구입하다 보니 며칠 새 책꽂이가 꽉 차버렸다. 더 꽂을 데가 없었다. ‘에이, 3단짜리를 살 걸….’

책꽂이를 다시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저께부터였다. 책꽂이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났다. 멀쩡한 책꽂이를 두고 새로 사기도 그렇고, 3단짜리로 바꾸고 싶은데 구입한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바꿔줄 지도 의문이고.

오늘은 어떻게든 결판을 내고 싶었다. ‘일단 들고 가보자. 돈을 좀 얹어주면 바꿔 주겠지.’
나는 책꽂이를 들고 하숙집을 나섰다. 밖은 벌써 캄캄했다. 골목길을 조금 걸어 나오자 학교 정문 앞에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정문 앞 큰길로 들어서는 순간, 무엇을 들고 학교 안에서 막 교문 밖으로 나오고 있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여자들 같았고, 함께 들고 있는 것은 분명 책꽂이였다. 온몸에 감전(感電)이라도 된 듯 동상처럼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두 여자도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이 밤중에 책꽂이를 들고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거기는 어디 가시는 데요?”
한 여자가 반문했다.

“예, 책꽂이가 너무 작아서 큰 걸로 바꾸러 가는 데요.”
“어머나, 우린 너무 커서 작은 걸로 바꾸러 가는데….”

그 여자들 것은 3단짜리였다. 우째 이런 일이! 남과 북에 흩어져 사는 이산가족이 반세기만에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들고 온 책꽂이를 들어 보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거면 됐어요?”
“예, 됐어요. 2단짜리로 바꾸려고 했어요. 어머나, 웬일이야. 어쩌면 이런 일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책꽂이를 서로 바꾸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이 잠시 귀엣말로 소곤소곤 하더니 그중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그냥 헤어져요?”
“예? 아 예, 그러면 안 되죠. 차 한 잔 해야죠.”

정문 수위실에 책꽂이 두 개를 맡겼다. 커피숍에 들어서다가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 댕기머리!’ 아까 학교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같이 온 여자는 함께 보았던 그 여학생인지 확실치 않았으나 댕기머리는 틀림없었다.

“기숙사에서 나오셨죠?”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초저녁 무렵 둘이서 기숙사로 가는 모습을 강의실에서 내려다보았는데, 헤어스타일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댕기머리(?)가 살포시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뻤다. 옆 친구가 물었다.

“거기가 법대 건물이죠? 그러면 법대생인가요?”
“예, 얼마 전에 제대하고 이번에 법학과 2학년에 복학했죠. 복학 후 처음 만난 여자들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내가 너스레를 떨자 댕기머리가 말을 받았다.

“어머, 우리도 2학년인데, 저흰 둘 다 영문과예요. 생각해보니 정말 보통 인연이 아닌가 봐요. 우리가 조금만 일찍 나왔거나 늦게 나왔으면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 이런 것을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던가. 이제 굳히기(?)에 들어가는 거다. 나는 댕기머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참, 누가 책꽂이 주인입니까?”
“제 꺼예요. 어제 샀는데 가져가서 보니 너무 컸어요.”

역시 댕기머리였다. 옆 친구는 그때서야 주제파악을 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됐다. 일이 아주 술술 잘 풀려가는구나. 나는 혼자서 가만히 쾌재를 불렀다.

“자, 이제 우리 통성명이나 하죠. 저는 ‘제갈진’입니다. 제 성이 워낙 희성이라서 아마 쉽게 잊어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접시 만하게 커지는가 싶더니, 곧 댕기머리의 풀죽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이상한 인연이네요. 전 ‘제갈현희’예요. 우린 친척간이네요. 제갈 씨는 모두 동성동본이잖아요.”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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