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꽃 향기
라일락꽃 향기
  • EPJ
  • 승인 2011.04.1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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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의 꽁트 마당(32)
찬규의 마음은 오늘따라 더욱 무거웠다. 작년 말에 아내를 잃고 난 뒤 늘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이제 겨우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오늘 윤희를 데리고 입학식에 갈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던 것이다.

주위에선 재혼을 하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아직 그럴 경황이 없었다. 매일 파출부가 와서 집안 청소를 하고 애를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다. 파출부에게 윤희의 입학식에 따라가 달라고 부탁하려다가 그만두었었다.

“아빠, 비가 와요. 우산 쓰고 갈래요.”
넥타이를 매고 있는 찬규의 등 뒤에서 윤희가 말했다. 목소리가 들떠 있는 것을 보니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집을 나섰다. 오늘 비가 오는 관계로 입학식은 교실에서 한다는 안내판이 교문에 붙어 있었다.

1학년 7반 교실을 찾아 윤희를 들여보냈다. 꼬마들 숫자만큼 되어 보이는 학부형들이 복도에서 교실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여선생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간혹 밖으로 들렸지만 교실 안은 온통 개구리들이 울어대는 무논이었다.

이윽고 입학식이 시작된 듯 각 교실마다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나왔다. 노래가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교실에 설치된 비디오를 통해 교장선생님이 훈시를 하고 있었다.

복도를 아무리 둘러봐도 학부형 중에 남자는 없었다. 아니, 처음에 몇 사람 보이는가 싶더니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까부터 복도 저쪽에서 찬규를 쳐다보고 있던 한 여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혹시, 백찬규 씨 아니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경남 밀양에 있는 H중학교에 다닐 때….”
“아! 남, 남인혜 씨.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군요.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누가 입학했어요?”
“아들이에요. 거기는요?”
“저는 딸입니다.”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 사내아이가 뛰어와서 그녀에게 매달렸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 9시까지 이 교실로 오라고 하셨어.”

찬규가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아드님이 인혜 씨를 많이 닮았군요.”

그때 윤희가 왔다. 그는 윤희를 인혜에게 인사시켰다.
“그래, 윤희. 참 예쁘구나, 앞으로 우리 상훈이랑 사이좋게 지내, 응?”

함께 운동장을 걸어 나왔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참, 그 해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학교에 갔었어요. 인혜 씨도 전학을 가고 없더군요. 그 후에는 다시 거기에 가지 않았죠. 가끔 인혜 씨 생각이 나곤 했었소. 언제 전화 한번 주시면….”
학교 앞에서 헤어질 때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날 늦게 회사에 출근한 그는 내내 20여 년 전의 기억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인혜는 아련하게 떠오르는 찬규의 첫사랑이었다. 그가 인혜를 만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읍내에 있는 M중학교를 가지 않고 부산에 있는 좀 괜찮은 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시골에 있는 H중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 학교는 불교재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인데, 몇 달 후에 M중학교로 전학 갈 생각으로 다니게 된 것이었다. 대구에서 온 인혜도 비슷한 이유로 그 학교에 들어와 찬규와 한 반이 되었다.

인혜는 예쁜 데다 얼굴이 유난히 하얘서 다른 시골 여학생들과는 한눈에 구별이 되었다. 우리 반 급우들은 물론 2, 3학년 선배들에게도 인혜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찬규와 인혜는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다. 매월 말 성적표를 받으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누가 1등인가 하고….

찬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씩 있는 불교시간이었다. 처음, 담임선생님이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손을 든 사람이 인혜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찬규도 재빨리 손을 들었다. 그때부터 불교시간에는 인혜와 함께 닭장에 사료를 넣어주고 토끼에게 줄 풀을 베었다.

닭 모이는 인혜가, 풀 베는 일은 찬규가 도맡아 했다. 그 시간이 되면 인혜가 껌을 하나씩 주었다. 껌을 내미는 인혜의 가늘고 하얀 손, 그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인혜가 주는 껌은 호주머니에 며칠씩 넣어 다니다가 포장지가 닳아 헤질 때쯤 꺼내 씹었다.

주산시간이었다. 찬규가 앞에 나가서 숫자를 불러주고 손드는 사람을 한 사람씩 지명해서 답을 확인하는 수업이었다. 그는 숫자를 다 불러놓고 인혜가 손들 때를 기다렸다가 계속 인혜만 지명했다. 그 때문에 찬규가 인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들통 나고 말았다.

그날 찬규는 하교 길에 어느 집 담 밑에서, 인혜를 좋아하는, 그보다 서너 살이나 많은 2학년 선배한테 초주검이 되도록 얻어터졌지만 인혜를 포기한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그 선배가 떠난 후에도 찬규는 그 집 담 밑에 오랫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얻어맞은 곳이 아파서, 나중에는 그 집 담 너머로 몽실몽실 풍겨오는 라일락꽃 향기에 취해서….

이튿날 불교시간에 단둘이 되었을 때, 왜 선배한테 맞았느냐는 인혜의 물음에 찬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은 인혜가 볼펜을 하나 주었다. 난생 처음 가져보는 볼펜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그 볼펜을 쥐고 잠을 잤다.

5월말이 되었다.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전학이 되었으니 6월 1일부터 읍내 M중학교로 등교하라고 하셨다. 담임선생님이 급우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라고 했을 때 찬규는 그저 인혜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헤어졌다.

그해 7월, 여름방학을 하자마자 학교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만난 급우들로부터 인혜가 대구로 전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윤희의 입학식이 있은 지 며칠 후, 찬규는 인혜의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인혜. 한번 만나 뵈었으면 해요. 오늘 상훈이한테 들었어요. 윤희에게 엄마가 안 계신다는 것을….”

최용현 작가는
수필가,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현), 월간 ‘국세’ ‘전력기술인’ ‘전기설비’ 등에 고정칼럼 연재(현), 작품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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